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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삼국의 목소리를 듣다 – 신라·백제·고구려 금석문 비교 해석

by 루루젤라 2025. 5. 9.

금석문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오늘의 고대 삼국의 목소리를 듣다 - 신라, 백제, 고구려의 금석문을 비교한 내용을 작성해보려고 합니다.

 

광개토왕릉비 (출처: 위키백과)
광개토왕릉비 (출처: 위키백과)

금석문이란 무엇인가 – 고대의 살아있는 기록

‘금석문(金石文)’이란 돌(石)이나 금속(金)에 새긴 문자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비석이나 종, 청동기 같은 물체에 새겨진 글입니다.
고대에는 종이와 잉크가 귀했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이나 기록은 견고한 재료에 새겨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금석문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1차 사료로서 매우 높은 가치를 가집니다.

한반도에는 삼국시대부터 다양한 금석문이 존재해 왔으며, 이를 통해 당시의 정치 체제, 왕권, 외교, 언어, 나아가 문자 사용의 방식까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릉비, 백제의 사택지적비, 신라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등이 있습니다.
이들 금석문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각국의 사상과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신라·백제·고구려의 주요 금석문을 각각 살펴보고, 이를 문체·내용·언어 구조 측면에서 비교해 보겠습니다.

 

삼국 금석문의 대표 예시와 구조 분석


▍고구려 – 위용과 자긍심의 기록,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시기: 414년

위치: 중국 지린성 지안

내용: 고구려 제19대 왕 광개토대왕의 업적과 왕자 장수왕의 효심, 그리고 고구려의 건국과 전쟁 승리 등이 담겨 있음

언어·문체 특징:

문어체 한문으로 쓰였으며,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강조

자국 중심 서술 방식으로, 왜(倭)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실을 과장되게 기술

왕권의 신성함을 부각시키고 천제(天帝)의 후손임을 자처함

의의: 동북아 외교 관계, 고대 한일 관계(왜와 백제 동맹) 등 국제정세 이해에 핵심 자료

 

▍백제 – 불교와 귀족 사회의 분위기, 사택지적비
건립 시기: 654년경(의자왕대)

위치: 충남 부여군

내용: 백제 귀족 사택지적(沙宅智積)이 자신의 부모를 위해 불탑을 세운 사실을 기록한 비석

언어·문체 특징:

유려한 한문 문장, 불교적 용어와 은유 다수 사용

공손한 문체와 함께 불교의 공덕(功德)과 윤회 사상을 강조

왕이나 정치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신앙과 효심 중심의 기록

의의: 백제 후기 불교 문화의 정착과 귀족 중심 사회의 풍조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

 

▍신라 – 왕의 통치와 정복 선언, 진흥왕 순수비
건립 시기: 6세기 중엽 (540~560년 사이)

위치: 북한산, 창녕, 황초령 등지에 분포

내용: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한 지역을 직접 순시하며 새긴 정복의 기념비

언어·문체 특징:

고체 한문과 향가식 토착 요소가 섞인 혼합 문체

“신라왕진흥태왕” 등 강한 왕권 표기법과 신성성 강조

정복 지역의 지명, 일정, 수행자 명단 등을 구체적으로 나열

의의: 삼국 통일 전야, 신라의 정복 왕권 강화와 행정력의 발전을 보여주는 실증적 자료

 

금석문으로 본 삼국의 문자 문화와 국가 의식 비교


삼국의 금석문을 비교해보면, 각국의 정치체제, 문화, 언어사용 방식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아래는 주요 특징을 정리한 비교표입니다.

항목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 백제 사택지적비 신라 진흥왕 순수비
기록 주체 왕(장수왕) 귀족(사택지적) 왕(진흥왕)
주요 내용 왕의 업적, 전쟁, 천제 계승 부모 공양, 불탑 건립 영토 정복, 행차 기념
문체 권위적, 전쟁 중심 불교적, 문학적 실용적, 행정적
언어 고급 한문, 자국 중심 시각 고급 한문, 불교용어 다수 한문 기반 + 토착어 일부 혼용
정치 메시지 고구려의 패권 주장 귀족 개인의 신앙 표현 신라 왕권의 정당성과 정복 선언

 

이러한 비교를 통해, 고구려는 제국적 시각, 백제는 문화적·귀족적 시각, 신라는 정복과 통치 기반의 실용적 시각에서 금석문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세 나라 모두 한문을 공식 문자로 사용하되, 그 쓰임새와 목적은 크게 달랐습니다. 이는 당시 각국의 정치적 성향과 문화 정체성, 나아가 문자 수용 태도까지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금석문은 침묵하지 않는다

금석문은 단순히 오래된 돌이나 쇠붙이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고대인의 목소리, 시대의 기운, 권력과 신앙, 문화와 언어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한 줄의 비문은, 수십 권의 사서보다 더 많은 진실을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삼국의 금석문을 통해 우리는 글로 말하고 싶었던 왕들의 자부심, 죽은 부모를 위한 자식의 효심, 영토를 확장한 후 그 사실을 세상에남기려는 욕망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과연 수백 년 후, 우리가 남긴 기록은 어떻게 읽힐까요?
고대의 금석문이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걸 듯, 우리가 남기는 말도 결국, 후세를 향한 금석문이 될 것입니다.

 

 

 

📚 참고자료

『삼국사기』, 『삼국유사』

한국고대사학회, 『금석문과 삼국시대 정치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해설 자료

한국고전번역원 디지털 금석문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