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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이전, 조상들은 어떻게 우리말을 적었을까?

by 루루젤라 2025. 5. 9.

오늘날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는 한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글이 창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500여 년 전, 1443년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1446년에 반포되었습니다. 훈민정음 이전, 조상들은 어떻게 우리말을 적었을까요? 오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훈민정음 이전, 조상들은 어떻게 우리말을 적었을까?
훈민정음 이전, 조상들은 어떻게 우리말을 적었을까?

 

한글이 없던 시절, 말은 어떻게 기록됐을까? 

 

사실 한반도에는 고유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중국에서 전래된 한자가 오랫동안 공식 문자로 사용되었습니다. 문제는 한자의 문법 체계와 한국어의 어순과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한국어는 주어-목적어-동사의 어순(SOV)을 따르는 반면, 한문은 주어-동사-목적어(SVO) 구조입니다. 또한 한국어에는 다양한 조사와 어미가 있어 이를 한자로 표현하기에는 큰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불일치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한국어를 기록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바로 이두(吏讀), 향찰(鄕札), 구결(口訣)입니다. 이들은 비록 표준화된 문자는 아니었지만, 훈민정음이 탄생하기 전까지 한국어를 기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귀중한 언어 자산이었습니다.

 

이두·향찰·구결, 세 가지 문자 방식의 구조와 특징

▍이두(吏讀) – 실용적인 문서용 문자
이두는 한자를 한국어 어순에 맞게 배열하고, 일부 문법적 요소를 표현할 수 있도록 변형한 문자 체계입니다. ‘이두’라는 말은 ‘관리의 읽기’라는 뜻으로, 주로 공문서나 행정적 기록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왕명 전달, 관리 임명, 세금 기록 등의 행정 업무에 널리 쓰였습니다.

이두는 한자의 음(소리)과 훈(뜻)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우리말의 문법 구조에 맞춰 문장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조사와 어미 표현을 위해 한자 중에서 의미보다는 음을 기준으로 차용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君來日'(군래일)은 ‘임금이 오시는 날’이라는 뜻으로, '君(임금)', '來(오다)', '日(날)'이라는 한자들을 조합하여 우리말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두는 한자를 변형하여 만든 일종의 문법화된 표기법으로, 관료들이 사용하기 위해 학습이 필요했으며, 당시로선 문장 기록에 있어 비교적 실용적이고 명확한 방법이었습니다.

 

▍향찰(鄕札) – 노래 속에 숨겨진 고대어
향찰은 신라와 고려 시대의 시가(특히 향가)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된 특수한 표기 방식입니다. 여기서 ‘향(鄕)’은 ‘고유한 것’, ‘우리 것’을 의미하고, ‘찰(札)’은 ‘문서’, ‘기록’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말을 적기 위한 문자’였던 것이죠.

향찰은 한자의 의미(훈)와 음(소리)를 혼합하여 한국어 문장을 옮기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체언이나 용언의 어간은 의미 중심의 한자(훈독)로, 조사나 어미 등 문법 요소는 음 중심의 한자(음독)로 표시하였습니다. 이처럼 복합적인 방식으로 인해 향찰은 문장을 구성하는 데 있어 굉장히 복잡하고 난해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삼국유사>와 <균여전> 등에 실린 향가(鄕歌)가 있습니다. 서동요, 헌화가, 찬기파랑가 등은 모두 향찰로 기록된 고대 시가로, 당시 사람들의 사상, 감정,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향찰의 존재는 우리가 훈민정음 이전에도 이미 체계적인 한국어 기록 문화를 시도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이며, 향찰의 분석은 고대 한국어 문법 연구에도 큰 단서를 제공합니다.

 

▍구결(口訣) – 한문 독해를 위한 보조 기호
구결은 본래 한문 경전을 읽을 때, 한국어 문장 구조로 해석하기 위해 덧붙여 쓰던 보조 표기입니다. 구결은 한문 옆이나 사이에 조사나 어미 등 한국어 문법 요소를 작은 글씨로 삽입해 놓은 형태로, 오늘날의 주석이나 루비 문자와도 유사한 개념입니다.

이 방식은 주로 불교 경전을 교육하거나 독송할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구결 유물로는 <법화경구결>, <원각경 구결> 등이 있으며, 이들은 통일신라~고려 시기의 경전 교육 현장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구결을 통해 경전을 한국어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자 해득 능력이 부족한 일반 승려나 학습자도 경전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구결의 문자는 명확히 표준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문법적 정보를 표현하는 방식이 발달해 있어 후대 한글 문법 체계와의 연속성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구결은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언어교육 도구이자 문자 기록 기술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세 가지 문자 실험이 남긴 유산

이두, 향찰, 구결은 모두 한자의 한계 속에서 우리말을 기록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이들은 정식 문자 체계는 아니었지만, 언어 표현을 위한 필요성과 노력의 산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 가지 방식은 단순히 한자를 빌려 쓴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언어 구조와 말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독창적으로 변형하고 조합한 결과입니다. 이는 한국어를 문자로 표현하기 위한 초기의 실험이자, 한글 창제의 사상적·기술적 배경으로 이어졌습니다.

훈민정음은 단지 처음부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문자’가 아니라, 수백 년에 걸친 문자 실험과 언어 연구의 결정체였습니다. 이두의 실용성, 향찰의 문학적 감수성, 구결의 교육적 목적은 모두 한글 속에 자연스럽게 계승되었습니다.

오늘날 이들 문자 방식은 이미 사용되지 않지만, 한국어의 문자화 역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우리의 문자와 언어를 이해하려면, 한글 이전의 이러한 시도들부터 되짚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 참고자료

<삼국유사>, <균여전>, <법화경구결>
국립국어원 자료
김석득 외, 『고대 국어의 문자 표기 연구』
한국고전번역원 디지털자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