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가 일본에 도입되기 이전, 일본에는 자체적인 고대 문자가 존재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민간 신앙이나 전통 신사 중심의 기록에서 자주 등장하며, 이들은 모두 ‘신대 문자(神代文字)’라는 이름으로 통칭됩니다. 이 글에서는 신대 문자란 무엇인지, 실제 유물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학계에서는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차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더불어 이를 둘러싼 문화적 상징성과 민속학적 가치를 함께 조명합니다.
신대 문자(神代文字)란 무엇인가?
신대 문자란 말 그대로 ‘신들의 시대의 문자’라는 의미로, 일본에서 한자가 들어오기 전 이미 존재했던 문자라고 주장되는 체계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주장은 주로 에도 시대 이후의 고문서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 수는 수십 종에 이른다고 전해집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규슈 지방에서 사용되었다는 ‘아히루 문자’, 신화에 기반을 둔 음절 문자 형태의 ‘히후미 문자’, 그리고 히라가나나 가타카나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고대 음절 문자 체계 등이 있습니다. 또한 ‘텐쇼 문자’라고 불리는 계통은 천손강림 신화와 연계된 신비적 성격을 띤 문자로서 소개되기도 합니다. 이들 대부분은 음절 기반의 문자 또는 그림 문자와 유사한 상형 구조를 가지며, 일정한 문법 체계 없이 민속적 기록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신대 문자는 학문적 문자 체계라기보다는 신토적 상징성과 신비주의를 결합한 민속 문자의 성격을 강하게 띱니다. 그 내용과 형식은 다양한데, 실존 여부와는 별개로 일본 고유의 신화적 세계관과 문명 의식이 반영된 상징적 체계로 볼 수 있습니다.
실물 유물은 존재하는가?
신대 문자에 대한 가장 큰 논쟁은 그것이 실제로 쓰였다는 고고학적 유물이 없다는 점입니다. 현재까지 일본 열도에서 발굴된 선사시대 혹은 야마타이국, 고훈 시대 등의 유적지에서는 신대 문자로 보이는 금석문이나 점토판, 목간 등 공식적인 문자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이나 신사 중심으로 전해지는 여러 주장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규슈 지방 아마쿠사 지역에서는 일부 신사 건축물 안쪽에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이를 아히루 문자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또한 이세 신궁 부근의 신관 가문에서는 조상 대대로 보관해온 문서 속에서 신대 문자로 보이는 기호들이 나타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대부분 공식적인 학술 검토를 거치지 않았으며, 발견된 유물들 또한 제작 시기나 진위 여부가 불확실합니다. 특히 많은 경우 이러한 문서들은 에도 시대나 그 이후에 기록된 것이며, 당시 민족주의적 또는 종교적 목적에서 후대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반론이 있습니다. 이처럼 확정적인 고대 유물이 부재하다는 점은 신대 문자의 실존에 큰 의문을 남깁니다.
학계의 입장: 국학(国学)과 민속학 사이의 갈등
일본의 역사학계와 문헌학계에서는 신대 문자의 실존 가능성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문자의 역사적 계보와 전승 체계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문자는 주변 문자와의 연관성과 점진적 변화 과정을 통해 그 계통이 확인되는데, 신대 문자는 그와 같은 역사적 흐름에서 단절되어 있으며, 일본 내부에서도 지역마다 전혀 다른 형태로 등장합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되는 증거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석기 시대부터 야마토 왕권 성립 시기까지의 일본 유적들에서는 문자의 사용 흔적이 거의 없으며, 이에 따라 갑자기 문자 체계가 독립적으로 생성되었다는 가설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신대 문자로 알려진 기호들의 많은 수가 실제로는 후대 국학자나 신토 사상가들이 창작하거나 조합해낸 것으로 파악되며, 당시 일본 사회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거나 종교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민속학이나 종교학의 영역에서는 신대 문자를 단순한 허구로만 치부하기보다는, 그 상징성과 신앙적 맥락을 중시하는 경향도 존재합니다. 특히 일본 전통 신사에서는 신대 문자를 ‘신령과 소통하기 위한 언어’ 또는 ‘신비한 언어적 기호’로 간주하여, 제례 의식에서 사용하거나 건축물 장식에 활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자 논쟁이 말해주는 것들
결국 신대 문자의 실존 여부는 단순히 고고학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인들의 역사 인식과 정체성, 그리고 종교적 감수성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근대 이후 서구 문물의 유입과 함께 일본 내부에서도 ‘진정한 일본적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신대 문자는 ‘상실된 고대의 지혜’라는 신화적 상징으로 기능하기도 했습니다.
21세기 들어서도 신대 문자는 음모론이나 미스터리 콘텐츠의 소재로 재활용되며, 일본 대중문화에서 일정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재해석과 예술적 차용도 늘고 있으며, 일부 자민족주의적 논의 속에서는 신대 문자의 ‘부활’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존재합니다.
이처럼 신대 문자는 단지 사실 여부를 둘러싼 논쟁에 그치지 않고, 일본 사회의 역사 해석 방식과 자문화 중심주의, 신앙적 세계관이 어떻게 구성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맺음말: 실존하지 않아도 유의미한 유산
신대 문자의 실존은 아직까지 학문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담고 있는 상징성과 문화적 의의는 여전히 탐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문자란 단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한 사회의 사고방식과 정체성을 반영하는 중요한 문화 코드입니다.
비록 신대 문자가 실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고 전승하고자 한 사람들의 노력은 일본인의 문화적 상상력과 민속적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큰 단서를 제공합니다. 실재와 허구, 신화와 역사 사이에서 우리는 때때로 진실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